중국의 시작은 아주 먼 옛날 황하 유역에서 시작된 황하 문명이 중국 역사의 시작이다. 선사시대의 농민들은 부족과 연합국가를 이뤄살아가고, 중국의 전설에 따르면 삼황오제의 시대를 지나 삼황오제 중 한 명의 손자로 알려진 우가 하나라를 건국하였고, 이후 탕왕이 하나라를 정복하여 상나라(은나라)의 시대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한나라의 사마천은 중국 역사를 오제시대부터라 주장한다. 오제시대란 황제, 전욱, 제곡, 요, 순 으로 총 5가지 시대를 가지고 있어 오제시대라한다. 사마천이 아닌 다른 역사학자들 중에는 오제이전에 삼황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삼황은 복희, 여와, 신농이라는 3가지 시대를 말한다. 사마천은 오제시대가 중국 역사의 시작이라 말한다 그 이유는 황제 이전의 시대의 인물을 신화같은 느낌이라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주장하며 황제시대부터가 중국의 역사시작이라 말하는 것이다. 오제 시대는 역사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전설의 시대이다. 당시의 문화 및 정보가 문자로 남아있지 않은 시대이기에 당시의 화석이나 유물을 통해 문자 기록 이전의 역사, 선사시대의 역사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황제부터 하왕조까지는 신화와 전설의 시대라고 말 할 수 있다. 정확한 연대가 기록으로 전해지는 시대는 주나라 공화 원년, 기원전 841년부터 이다. 중국은 다민족국가로 총 56개의 민족이 합쳐서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다원일체’를 강조함으로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황제의 이름 밑으로 다양한 중국민족이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 당시에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1세기 경, 고고학적으로 인정받는 상나라의 시대가 열린다. 하지만 상나라의 마지막 주왕은 주나라에서 보낸 미녀 달기에게 휘둘려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상나라의 주왕은 달기릐 사치를 위해 매년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였으며,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았으며, 방탕한 삶을 살았다. 또한 주왕과 달기는 기름이 칠해진 구리 기둥 아래에 이글거리는 숯불을 피워놓고, 죄인에게 그 위를 지나가도록 하는 ‘포락지형’을 즐기는 등 잔인하고 방탕한 삶으로 인해 백성의 민심을 잃게 된다. 이로 인해 주나라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그 누구도 진심으로 맞서 싸우고자 하는 이가 없었고 결국 상나라는 주나라 무왕에 의해 패망하게 된다. 이런 방법의 패망은 중국사에 전형적인 패턴으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후 주나라가 광대한 땅을 지배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봉건제도이다. 왕에게 영토를 받은 제후는 그 지역 백성을 다스렸다. 또한 중국 최초의 토지제도인 정전법이 실시되기도 했다. 그러다 주나라가 분열되면서 각지의 독립된 제후가 나라를 세운다. 이때 모든 제후국들이 세력 팽창에 혈안되어 대륙 전체가 대 혼란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이로써 피 튀기는 중국 역사의 서막을 알리는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어 약 550년 동안 이어진다.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제후국들이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며 서로 힘겨루기를 하던 시대가 바로 춘추전국시대이다. ‘춘추오패와 전국칠웅’ 춘추시대에는 명목상이라도 주왕실을 받을었고, 나름대로 지켜야 할 원칙과 질서가 존재했다면, 전국시대에서는 오직 힘만이 진리인 약육강식의 시대가 열림으로 패권다툼과 잦은 다툼이 있었던 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되었다. 춘추오패에서 패는 패자. 제후들 사이에서 맹주로 군림한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패자는 천자가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제후들을 이끌어나가며 중원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정지, 경제, 군사 등과 관련하여 제후들을 한곳에 모이게하여 맹약을 맺는 회맹의 주관도 패자의 몫이었다. 이후 전국칠옹에서는 패권다툼이 있었으며, 수백 개의 나라에서 단 일곱 나라만 생존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전쟁과 모략과 희생이 있었을지, 생존한 일곱나라는 각국의 부국강병을 위해 얼마나 힘을 쓰고 노력했을지, 이런 시대를 살던 이들의 삶은 어떠했을지, 생존이 과제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어떠했을지에 대해 생각하면, 이 당시에 왜 많은 사상가들이 존재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춘추전국시대는 중국의 근간을 형성한 시기로서 봉건제에서 군현제로,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지방분권에서 중앙집권으로 가는 과도기였다. 철제 무기와 농기구가 사용되고 토지사유제가 도입되었으며 회폐가 유통되고 상품경제가 발전하며 도시가 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류 정신의 기원이 되는 ‘축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고, 유가 • 법가 • 도가 • 묵가 등의 학파를 이끈 제자백가가 등장하였다. 제자백가는 인간성을 잃어가던 세상 속에서 사상과 문화의 최대 번영기를 꽃피우게 된다. 이후 전국칠웅은 전하 통일을 위한 질주를 한다.
-중국역사 1 (전설시대 ~ 춘추전국)-
진 (B.C. 221-B.C.206)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중국 전역을 통일하게 된다. 이로써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적 통일국가인 진나라의 시대가 시작된다. 통일의 주인공은 진시황으로 알려져 있는 시황제 영정이다. 대신들은 영정에게 천하통일의 새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칭호를 가지라고 권한다. 영정은 자신의 덕과 공로가 전설적인 제왕들인 삼황오제보다 뛰어나다는 의미에서 삼황오제의 ‘황’과 ‘제’를 따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황제의 직위를 취함으로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이 되었다. 진시황은 13살의 어린 나이에 진나라의 제 31대 왕이 되었다. 그렇기에 어머니와 승상 여불위가 섭정을 맡았고, 그가 22살이 되던 해 영정은 여불위를 해임하고 직접 통치를 할 수 있도록 친정에 들어갓다. 이사를 재상으로 발탁하고 그는 법가 사상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주제를 수립하였다. 이렇게 약 10년에 걸쳐 중국 통일을 이뤘다. 그는 중국전체를 직접 다스리기 위해 전국을 군과 현으로 나누고 군 현의 장관을 황제가 임명하는 최초의 군현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길이,양, 무게를 재는 도량형을 통일하고 반량전이라는 표준 화폐를 주조하였다. 이렇게 통일된 영토가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수레바퀴 폭을 통일함으로 수레가 전국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도록 전국적인 도로망을 구축하였다. 또한 하드웨어적 통일을 넘어 문화의 동질화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첫번째로 문자 통일을 했으며, 공동의 적을 만들어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도록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는 흉노의 방어 및 정치적 통제의 역할로 약 30만 대군과 수백만 백성의 피와 땀으로 건설한 만리장성을 예로 들수 있다. 또한 진시황은 언론과 창작의 자유를 심하게 억압하였다. 사상 통제를 위해 자신의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선비들을 모두 잡아 땅에 생매장 시켰고, 정치에 유해하다고 인정된 모든 책을 불태우는 일을 하였다. 이것이 분서갱유 사건이다. 또한 진시황은 자신이 죽어서 들어갈 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진시황릉인 여산릉이 완성되기까지는 무려 36년이나 걸렸다. 또한 아방궁이라는 대규모의 궁전도 지었다. 아방궁은 무려 70만명이 넘는 사람이 동원되었다. 아방궁은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도 완성되지 않았고, 항우가 아방궁을 불질렀을 때에 3달 동안이나 불길이 사그라지지 않았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던것을 예상 할 수 있다. 진나라의 백성들은 가혹한 형벌과 노역에 나라에 대한 원성이 높아졌다. 그러다 진시황이 5번째 순행 중 세상을 뜨게 된다. 시황제는 자신의 큰아들 부소에게 뒤를 잇게하라 유언하지만, 재상 이사와 환관 조고가 유언을 조작하여 부소가 자살을 하게 만들었으며, 호해 2세를 황제로 삼았다. 하지만 백성들은 시황제가 죽으면서 중국 최초 농민반란인 ‘진승과 오광이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진나라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 환관 조고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호해 2세는 반란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다. 유방이 수도 함양으로 압박해오자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을 3세 황제로 삼았다. 자영은 왕위에 오르자말자 조고를 죽였다. 하지만 자영은 황제가 된지 약 46일만에 유방에게 항복하였고, 유방의 뒤를 이러 함양에 들어온 항우에게 살해되었다. 진시황이 이룩한 통일은 약 15년 만에 멸망하였다.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세워지기까지 4년동안 항우와 유방은 치열한 사투를 벌인다.
-중국역사 2 (진나라)-
한 (B.C.206-A.D.220) 진나라 멸망 후 초나라 항우 VS 한나라 유방으로 나뉘어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사투를 벌이게 되고 이를 담은 책은 초한지이다. 초와 한의 싸움은 한나라의 승리로 이어졌고, 중국 최초의 평민출신 황제, 유방이 이끄는 한나라의 시대가 약 400년 넘게 지속되었다. 한나라는 200년 넘게 중앙집권국가를 유지하는데, 특히 무제 때 아시아에서 최고로 부강한 다민족 국가로 부상하게 된다. 무제는 15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고 6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무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제국의 영토를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한나라가 세워지고 60년이 지난 뒤 즉위한 무제는 튼튼한 국고를 바탕으로 한나라에 위협을 가하던 흉노에 공격적인 정책을 취할 수 있었다. 무제는 중국 역사상 연호를 처음 사용하기도했다. 세계가 황제에게 속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연호이다. 무제는 시황제의 봉선의식을 부활시킴으로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는 봉선 역시 세계의 주인인 천자만이 올릴 수 있는 고도의 상징성이 담긴 의식이었다. 무제는 상징적 측면 뿐만아니라 가시적인 측면에서도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였다. 그는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흉노 • 남월 • 고조선 등 원정을 단행하였다. 특히 흉노와 적대적 관계에 있던 월지와 동맹을 맺고자 장건을 파견한 것을 계기로, 실크로드가 개척되어 동서 문물의 교류가 일어나게 되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무제가 죽은 뒤 한나라 황실은 외척 세력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제가 죽고나서 8년 뒤 한나라의 황제 자리는 외척인 왕망에게 넘어가게 된다. 왕망은 나라이름을 신으로 정하고, 유교적 이상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정책은 실패했다. 토지의 국유화는 호조의 거센저항에 부딪혔고, 국가 위주의 유통시스템은 민간 상인의 몰락을 가져왓으며, 인위적인 물가 조절 정책과 화폐개혁은 물가 폭등과 경제 혼란을 야기했다. 이렇게 왕망의 신나라에 의해 한나라의 명망이 끊어지게 되었지만, 약 15년 만에 전한의 혈통인 유수가 신나라를 멸하고 다시 한을 재건한다. 그리고 이를 후한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후한의 국방력은 크게 강화되어 대 로마 제국과 맞먹을 만큼 영도를 확장하게 된다. 후한 말에는 국가 권력이 약화되면서 지방 분권적인 호족의 통치가 강화되었고, 사병을 소유하는 능력까지 갖추며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다 황건적의 난 이후 후한이 급격히 약해질 쯤 수많은 영웅들이 각자 나라를 세우고자 나서게 되었고 후한은 위,촉,오 삼국으로 분열된다.
-중국역사 3 (한나라)-
삼국 ~ 남북조 (220 - 589) 위나라의 조조, 촉나라의 유비, 오나라의 손권 천하삼분의 시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삼국 가운데 가장 많은 군대와 인구를 보유한 위나라의 조조가 촉나라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조조의 위나라는 사마씨에게 정권을 빼앗긴다. 사마씨는 삼국 간의 전쟁을 통해 두각을 나타내며 위의 내부에서 세력을 꾸준히 키웠다. 그리고 진(서진)을 세우게 된다. 서진은 손권의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한 이후 60년 만에 통일을 이뤘다. 하지만 이 통일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유지되었다. 왕조의 기초를 다지기도 전에 황제의 자리를 둘러싼 권력 투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를 ‘팔왕의 난’이라 한다. 서진은 동진으로 옮겨가게 되고, 원래 서진의 땅이었던 곳은 오랑캐가 차지해 ‘5호 16국’을 세웠다. 이때 북쪽 이민족의 왕조와 남쪽 한족의 왕조가 남북으로 균형을 이루던 시기를 남북조 시대라고 부르며 위나라부터 진나라, 남북조 시대까지는 위진남북조 시대라 부른다.
-중국역사 4 (삼국 ~ 남북조)-
수나라 ~ 당나라 (589 - 907) 혼란했던 남북조 시대는 수나라 1대 황제 양견에 의해 마무리 된다. 양견은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하엿고,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여 국력을 크게 키웠다. 그는 가문에 따라 관리를 등용하던 구품중정제를 폐지하고, 과거제도를 통해 관리를 선발하였다. 이런 조치로 수나라의 살림은 그 어느때 보다 넉넉했다. 하지만 그는 만년에 들어 성격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그는 둘째아들 광은 아버지 양견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자였다. 하지만 양견은 둘째 아들의 꾸며내는 성격에 속아 그를 황태자로 임명하게 된다. 이후 양견의 둘재아들은 중국의 제일가는 폭군으로 손꼽히게 됐다. 그는 아버지 양견과는 달리 사치와 향락에 빠져 지냈고, 대규모 토목 공사로 나라의 기둥을 뒤흔들었으며, 잦은 전쟁으로 수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대규모 궁전 건축 공사나 대운하 건설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한 과도한 세금 징수 등의 문제로 민심이 돌아서 수나라는 금세 종말을 맞이한다. 이후 수나라는 당나라로 바뀌어 이어진다. 많은 역사학자와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당나라는 중국 역사의 황금시대라 말하고 있다. 당 태종 이세민은 ‘정관의 치’라는 연호를 가질 정도로 태종은 태평성세의 대명사였다. 태종이 명군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비결은 ‘열린 귀’였다. 그는 신하들이 자신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가졌더라도 주저없이 간언할 것을 독려했다. 그는 태종이 황제가 되기전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벌였던 적수 이건성의 사람이었던 위징을 재상으로 중용함으로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도 품을줄 아는 사람이었다. 태종이 늘 귀담아들었던 위징의 말 가운데, 백성을 물에 비유한 말이 있다.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기도 한다.”이는 순자의 말을 인용해 태종에게 간언 한 것이다. 이렇게 태종은 많은 사람의 의견을 잘 수용하였으며, 항상 민심을 살폈다. 이후 중국에서는 유일한 여황제가 나오게 된다. 그녀가 측천무후이다. 측천무후는 원래 왕실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목재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12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이후 그녀는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 14살에 궁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는 뛰어난 용모와 총명함으로 태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녀는 649년 아이가 없었던 그녀는 태종이 사망하자 당시 황실 관습에 따라 감업사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그녀는 궁에 들어온지 12년이 지났지만, 태종의 총애는 짧은 시간 이뤄졌기에 자식이 없었다. 그렇게 비구니가 되어 살았지만, 그녀는 고종의 도움으로 다시 황실로 돌아오게 된다. 바로 태종의 아들 이치가 그녀를 좋아했다. 황태자 시절 부터 그녀를 좋아하던 이치는 즉위한 후 그녀를 후궁으로 삼고자 했다. 또한 왕 황후가 그녀를 이용해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소숙비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고종과 왕황후의 이해타실에 맞은 그녀는 소숙비를 몰아내었고 고종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녀는 황후가 되고자 왕 황후가 자신을 찾아왔다가 잠시 밖에 나간 사이 자신의 친딸의 목을 졸라 줄이고 황후에게 누명을 씌움으로 왕 황후를 폐위시키고 32세의 나이로 그녀는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에도 측천무후는 황후로서 권력을 잡게 되었고, 고종과 자신의 아들들을 죽이기까지 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켰다. 그녀는 67세에 선양의 형식으로 왕위를 이어받아 여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라 이름을 주나라로 변경까지 했다. 측천무후는 공포정치를 펼쳤고, 과거제도를 통해 신진 세력을 대거 기용하였다. 그녀는 약 50년 동안 중국을 지배하였다. 그녀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고 민생을 안정시키고 변경을 튼튼히 한 그녀의 공로는 뭇 남성 황제들의 업적을 뛰어넘는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뒤를 이어 중국을 통일한 왕조로 주변 민족을 복속시켜 세계제국이라 칭하는 대국을 건설하게 된다. 당나라는 당시 모든 문화를 흡수하여 문화와 예술이 고도로 발달했다. 그러다 중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인 양귀비가 등장한다. 현종이 양귀비를 만나기 몇 년전, 황후인 무혜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현종은 ㅇ우울하고 고독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궁궐의 수 많은 미녀를 뒤로하고 그가 관심을 보인 곳은 자신의 아들 이모의 아내인 양옥환이었다. 하지만 아들의 여자를 뺏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환관 고역사가 절묘한 방법을 내놓았다. 궁 안에 태진궁이라는 도교 사원을 짓고 양옥환을 르리 보내 신분 세탁 겸 도사가 되도록 한 것이다. 양옥환의 뛰어난 미모에 춤과 노래와 타고난 애교로 현종의 마음을 휘어 잡았고, 그녀는 귀비로 책봉되거 황후와 다름 없는 권세를 누렸다. 하지만 미녀 양귀비에 푹 빠진 현종에 대해 안록산이 난을 일으킨다. 결국 양귀비는 처형당하게되고 현종 또한 양귀비가 죽인지 6년 만에 병사하게 된다. 또한 사회불안과 재정궁핍으로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특히 875년 황소의 난이 10년이나 지속되면서 당나라는 거의 지배력을 잃고 무너졌고 그 결과 ‘5대 10국 시대’가 50년간 이어지면서 아찔한 대분열기가 이어진다.
-중국역사 5 (수나라 ~당나라)-
원나라 (1271-1368) 원나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칭기즈 칸이다. 그는 1162년 몽골 바이칼호 동쪽 숲에서 태어났다. 이 아이는 태어날 때 손에 피 한 움큼을 쥐고 있었기에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아이는 9살이 되던 해 보르지긴족의 우두머리인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되었다.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하기에는 아들이 어무 어리다 판단하였다. 같은 부족마저 아이의 가족에게 등을 돌렸기에 이 가족은 과일과 나무 뿌리, 물고기를 먹으며 연명했다. 이렇게 혹독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아이의 이름은 테무친. 테무친은 자신의 지지자를 모으고 정적을 제거해나가면서 초원의 유목사회를 통합하였고, 쿠릴타이에서 각 부족 우두머리들의 추대를 받아 칭기즈 칸이 되었다. 몽골 연맹체는 전쟁 시에는 칸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하였지만, 평상시에는 독자적으로 생활하였다. 칭기즈 칸은 점점 더 멀리 있는 공격 대상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지도 아래 몽골의 세력은 무서운 속도로 확장되었다. 그는 인도 북부와 러시아 남부까지 점령함으로 유라시아의 절반을 차지하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칸은 이 광활한 영토를 네 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렇게 러시아 남부, 중앙아시아 서부, 중앙아시아 동부 지역이 각 아들에게 분배되었다.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는 원나라 수도를 베이징으로 정한다. 원은 몽골 제일주의를 취하면서 중국인들의 전통과 문화를 짓밟기 시작했다. 원나라 말기로 갈수록 비참한 삶을 살던 한족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홍건적의 난’으로 원나라가 무너지고 홍건적 출신의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한다.
-중국역사 6 (원나라)-
명나라 (1368-1644) 명나라는 주중팔, 1328년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이 소년이 명나라를 건국하게 되는 홍무제 주원장이다. 중국 역사상 두 번째 평민 출신 황제인 주원장은 백성을 편히 다스리기 위해 힘쓰고 군사력도 강화한다. 주원장은 몽골의 풍습을 없애고, 원의 지배로 파괴된 한족 문화를 되살리고자 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명나라에 부벙부패가 만연해진다.
-중국역사 7 (명나라)-
제국의 번영(1644-1799) 명나라의 소식을 들은 후금 황제 누르하치가 명나라 침공에 성공하였고, 그의 아들 홍타이지는 후금에서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을 지배하는 대제국을 만들기 위해 1636년 국호를 대청으로 바꾸었다. 청나라는 한족의 전통을 존중해주었지만, 만주족의 풍습인 변발을 강요하고 한족을 탄압하기도 했다. 청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지출함으로 쇠퇴기에 들어서게 된다. 흔들리는 제국 (1839-1864) 당시 지식인들의 사이에서는 아편 흡연이 만연했다. 또한 18세기 후반 종교적 성격을 띤 농민 반란인 백련교의 난이 일어났다. 청나라 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십여년에 걸친 엄청난 재정을 투입하게 되었다. 또한 이때에 영국을 선두로 서구 열강이 아시아로 진출하였다. 이 때 중국에는 영국을 통해 아편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로 인해 1830년약 500만명의 사람이 아편 중독 환자가 있었으며 아편의 유입이 계속해서 증가하면서 많은 양의 중국의 은이 유출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처의 8대 황제 도광제는 임칙서에게 아편 무역을 종식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하지만, 이는 아편전쟁으로 이어졌고, 영국의 승리로 청나라는 영국에 홍콩을 할양하고 광주 외의 4군데를 더 개항함으로 몰수한 아편 대금과 전쟁 비용을 보상하게 되었다. 영국에 이어 미국과 프랑스와 러시아와 조약을 맺게 되었다. 영국은 청나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했다. 이러던 차에 1856년 애로호사건(제 2차 아편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아편잰쟁과 애로호사건, 이 두차례 통상 전쟁의 결과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했고, 천조로서의 자존심을 빼앗기게 되었다. 제국의 붕괴 (1860-1911) 1860년 10월 18일,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문화재 약탈 대국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원명원에 있던 수많은 보물을 죄다 약탈했다. 이 두 나라가 남의 나라 안방까지 군대를 이끌고 온 것은 청나라가 천진조양을 이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당시 황실 대표는 황풍제의 이복동생인 공친왕이었다. 그에게는 협상의 여지가 없었으며 청나라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북경조약이 체결되었다. 아편잰쟁이후 청나라의 연이은 패배, 태평천국군의 진압에서 유갑없이 발휘된 서양의 총포의 힘은 서양 군사기술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서구 열강의 힘은 함선과 총에 있다 생각한 청나라는 군수산업에 힘을 쏟았다. 이후에도 청나라는 대만사건, 청불전쟁, 청일전쟁의 위기를 겪는다. 이로 인해 류큐, 베트남,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청나라 내에서는 청나라 조정을 타도하고, 태평천국을 세우려는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의화단운동이라 불린 반외세 투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후, 청나라의 권력을 장악했던 서태후의 주로로 1901년 부터 10년 동안 청나라 최후의 개혁인 신정 개혁이 추진되었다. 서구식 제도들을 도입해 여러 분야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이 이뤄졌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가 너무 미미하였기에 국민들의 불만들 사게되었다.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서 중국에는 여러 사상을 가진 지식 계층이 급속히 성장했다. 지식 계층의 대표적인 세력은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입헌파와 공화정을 주장한 혁명파였다. 그리고 혁명파의 지도자는 쑨원이었다. 그는 1984년 하와이에 흥중회를 조직했고, 세력을 넓혀 청나라 황실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었다. 부장 투쟁이 일어지던 1911년 전국적인 대봉기가 일어나게 된다. 대봉기가 일어난 계기는 청나라 황실이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외국 자본을 끌어오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외국 자본을 끌어오는 담보물이 과거 서구열강에게 뺏겼다 이권회복 운동을 통해 되찾았던 철도 부설권이었다. 청나라는 철도를 정부의 소유로 만들려는 철도 국유화를 시도했다. 이로 인해 중국 전역에 철도 국유화에 반대하는 대규모 무장봉기가 이어졌고, 반란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중국 혁명파의 힘이 작동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1911년 10월 1일 중국 우창에서 신군이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이 봉기가 우창봉기이다.
-중국역사 8 (청나라)-
중화인민공화국(1912-1949) 쑨원의 혁명파는 1912년 1월 1일 난징에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 임시대총통으로 쑨원을 선출했다. 이것은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이라고 한다.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출발은 순탄하지 않았다. 신해혁명은 우발적으로 이뤄진 성격이 컸고, 공화국을 추진한 혁명파들은 정권을 지탱할 군사권이 약했고 재정이 약했다. 하지만 청나라 황실에서는 국내의 혼란을 진압하기 위해 총리로 임명한 사람이 위안스카이이다. 그는 강력한 군대와 자본을 가지고 있었고, 서구 열강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에 혁명파는 위안스카이와 타협하게 되었다. 타협의 내용은 황제 폐위, 공화제 실시, 수도를 난징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강력한 군사지휘권을 내세워 청나라 황실의 퇴위를 압박하게 되었다. 그리고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가 퇴위하게 되었다. 이로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공화국이 수립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1912년 3월 10일 쑨원을 대신해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혁명파는 국민당을 창당해 국회에 진출해 있었다. 1913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당이 많은 지지를 얻자 국민장 지도사 쑹자오런을 암살하고, 국민당을 강제 해산시켰다. 그리고 1914년에는 중화민국 국회를 해산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위안스카이는 권력에 눈이 멀었고, 이에 쑨원은 남쪽 7개의 성에서 위안스카이에 맞서 군대를 일으키지만, 패배하게 되고 혁명당원들과 함꼐 일본으로 망명해 중화혁명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욕심을 멈추지 않고, 황제가 되기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1915년 12월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홍헌으로 정했으며,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알게된 지방 군벌들의 거센 반발로 인해 군주제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6년 6월 6일 요독증으로 갑작스러운 병사를 하게 되었다. 위안스카이가 사망하자 중국의 정권은 군벌들의 손에 들어갔고, 군벌시대가 시작되었다. 군벌은 외세를 이용해 자신들의 권력을 키우는 것에 혈안되어 있었다. 많은 군벌 가운데 하나님 돤치루이의 배후에는 일본이 있었다. 일본은 돤치루이에게 거액의 차관을 제공하며 중국을 지배할 야심을 드러냈다. 제 1차 세계대전 중 돤치루이는 중국의 참전을 주장하며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의 의도는 이기회에 자신의 사병을 양성해 중국 전역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것이었다. 그 당시 중국의 남쪽 지역은 북경 정부에 복종하지 않는 여러 군벌들이 각자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상태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파리 강화회의가 열렸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승전국이 된 중국도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중국은 독일이 산동에 갖고 있던 이권의 반환과 21개조 조약의 폐지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중국이 1차세계대전에 참석하기 전 일본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와의 밀약를 통해 독일의 기존 이권을 양도 받기로 밑작업이 되어있었기에 중국의 요청은 거부되었다. 이에 대해 중국 국민들이 알게 되면서 중국 국민들을 중국의 이권을 노리는 열강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런 열강에 결탁한 군벌에 대한 분노로 “밖으로 국권을 쟁취하고 안으로 국적을 몰아내자”는 슬로건을 내건 ‘오사운동'을 벌이게된다. 오사운동은 21개조 조약의 폐지와 산동 이권의 회수를 요구하며 북경의 학생 3천여 명이 천안문광장에 모여 1919년 5월 4일에 하게 되었고, 이는 전국적으로 펴저나간 반제국주의 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군벌의 계파도 여러 개였으며, 같은 군벌 내부에서도 분열과 대립이 반복되어 혼란이 이어졌다. 1919년 쑨원은 중화혁명당의 명칭을 중국국민장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후 혁명을 성공시켜 군벌들을 장악해 혼란과 분열에 빠진 중국의 상황을 해결하고자 힘썼다. 하지만 재정과 군사 문제가 여전히 큰 난제였다. 이때 쑨원은 소련의 도움을 받아 이 두가지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하지만 소련의 지원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바로 중국 내부에 결성된 공산당 세력과 국민당 세력이 합작해서 혁명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쑨원은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국민당은 공산당과 손을 잡게되었다. 그리고 1925년 쑨원이 사망하고, 쑨원의 뒤를 이러 장제스가 국민당의 실권을 잡게 되었다. 장제스는 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어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대장정을 시작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합작을 통해 군벌 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과를 이루게 되었다. 이 시기 국민당 내부는 국민당 좌파세력과 공산당이 세력을 확장하여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장제스의 군사력을 제한하려 들었다. 이에 장제스는 1927년 4월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 세력을 숙청하였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은 결렬되었고, 두 세력 사이의 기나긴 내전이 시작되었다. 국민당을 장악한 장제스는 1928년 난징을 수도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고, 정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에 저항해 무장폭동을 일으키다 지하로 들어가 활동을 이어갔다. 장제스는 1030년~1034년 총 5차례에 걸쳐 공산당 토벌 작전을 벌였다. 공산당 세력은 대장정에 올라 1만킬로미터를 걸어 결국 산시성에 도착했고, 숨어 들어간 곳에서 세력을 정비하는 기간을 갖게 된다. 이 시기 국민당 정부가 직면한 가장 큰 대외문제는 일본의 만주 침략이었다. 일본군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를 불법 침략해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건국하기까지 했다. 일본은 만주국의 국가원수로 청나라가 몰락하며 폐위되었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앉혔다. 그러다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며 중일전쟁으로 이어지게된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다. 루거우차오는 베이징 시에 있는 다리이름이다. 일본은 중국의 허가없이 루거우차오 지역을 침입해 실탄사격 연습을 하고 있었고, 국민혁명군과 일본군은 루거오차오 다리를 놓고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야간 연습을 하던 일본군 중대에서 발포소리가 들린 뒤 일본군 병사 1명이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군대로 복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중국군이 일으킨 사건도 아니었고 오해가 있더라도 현지에서 해결할 수 있는 사소한 사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이 사건을 기회 삼아 중국을 침략하려는 정책을 구상했다. 또한 중국도 일본을 향한 최후의 결전을 펼칠 각오를 하고 있었다. 결국 중일 전쟁이 벌어지게되고, 2차 대전이 끝나는 1945년 까지 약 8년동안 전쟁을 하게 되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힘을 합쳐 2차 합작을 맺었고, 함께 일본에 저항했다. 중국인 중일 전쟁을 치르던 시기에 2차대전이 발생했고 공동의 적 일본을 상대하기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시적으로 손을 잡는 아슬한 협력 상태가 유지되었다. 2차 대전 당시 연합군 전략에서 중국의 중요도는 낮았고, 일본을 진압하기 위한 미국의 작전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군사력은 제외되었다. 2차 대전 내내 중국은 항일 투쟁을 벌임과 동시에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이로 인해 1937년~1945년까지 150만 명 이상의 중국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항일전쟁을 벌이는 기간동안 중국의 공산당 세력이 급격히 성장했다. 2차대전이 끝나자 곧바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이 일어났고 중국의 전쟁은 4년 동안 더 이어졌다. 국공내전의 결과 중국은 공산당이 득세하게 되었고,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섬으로 정부를 옮겼다. 이곳이 바로 중화민국, 현재의 대만이다.
-중국역사 9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자는 인(仁)을 강조하고 있다. 인은 유교에서 인간성, 즉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볼질이라고 본다. 이를 인간의 덕성으로 유교 윤리의 최고 덕목이다. '논어'를 통해 드러나는 공자의 사상 중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되는 것이 '인(仁)'이다. 공자가 창시한 유교의 핵심이 되는 것이 '인(仁)'이기에 인에대한 기념을 잘 알아야한다. 인(仁)은 인(人)과 이(二) 둘 이상의 사람관계에서 개념이 시작되었다. 인은 타인에 대한 사랑의 정신을 말하고 있다. 자기 몸과 자기 욕망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인의 실천의 시작이다. "자기 자신이 바라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인이란 이기적인 마음을 넘어서서 자기와 더불어 살고 있는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서 피어난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군자'라 한다. 이는 사회 계급상의 귀족이나, 명목상 학자를 칭하는 말이 아니다. 그 사람의 출신 성분이나 사회적 지위보다도 그 사람의 인격이나 덕성을 더 중요시하고 있다.
공자
중국을 통일한 위대한 군주, 진시황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가장 열정적이고 명석하여 위대한 군주의 한 사람으로, 문무 관료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한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여 전국시대 말의 혼란을 종식시켰다. 한, 위, 초, 연, 조, 제 6국을 멸망시키고 중국 최초의 천하통일을 한다. 그는 자신의 업적이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삼황오제만큼 대단하다 생각해 '황제'라는 칭호를 제정하고 스스로를 시황제라고 칭했다. 통치 체제를 위해 군현제를 시행했다. 전국을 36군과 1400여개의 현으로 나누었고, 이 군현에 군태수와 현령을 파견하여 강력한 중앙 짐권 정책을 추진했다. 이후, 각종 주요 법률을 제정하고, 문자, 도량형, 화폐등을 통일했고, 전국의 도로망 건설을 추진하였다. 또한 만리장성의 축조도 시작하였다. 군주로서 좋은 결과물도 많았지만, 진시황은 자신의 위엄과 권위를 중국 전역에 과시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구모의 여산릉, 아방궁을 비롯한 토목 공사에 국력과 민력을 낭비하였고, 가혹한 법치로 민중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또한 그는 모든 사람의 사상도 통일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분서갱유'라 불리는 사상 탄압 정책이 펼쳐졌다. 자신이 추구하는 법가 사상을 제외한 나머지 법가 사상의 책과 실용 서적을 소지할 수 없도록 막았으며, 관리가 아닌 이들의 학술 토론도 금지했다. 이에 많은 사상도서가 불에 타기도 했으며, 자신의 정책을 비판하는 유생 460여명을 생매장하는 엽기적인 갱유 사건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일들은 훗날 폭군, 독단적 군주 등이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꿈꾸며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러다니는 등 불로장생하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그는 전국을 순행 할 때에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사망했다.
진시황
파란만장한 측천무후의 삶 측천무후의 성은 '무' 이름은 '조'이며, 중국 '산시성'에서 태어났다. 측천무후는 어린 나이에 뛰어난 미모로 당나라 태종의 눈에 띄어 후궁으로 들어가지만, 그녀의 나이25세에 태종이 죽어 당시 궁중 법도에 따라 비구니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에 미모에 반한 사람은 태종의 아들 고종을 통해 다시 궁으로 들어온다. 그녀의 나의 33살, 황제인 고종은 28살이었다. 측천무후는 고종의 후궁이 된 이후 희대의 악녀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다. 고종이 자신을 두고 다른 후궁을 생각하는 것에 분노하여 그 후궁의 손발을 자른 다음 술 항아리에 가뒤 죽였으며, 황후를 몰아내기 위해 본인의 공주를 죽여 누명을 씌우기도 하였다. 또한 고종이 병으로 몸져 누웠을 때는 스스로 천후가 칭하고 정권을 장악했고, 본인의 권력 유지를 위해 자식과 손자도 죽였다. 자신의 장님이자 황태자인 이홍이 이복자매에게 동정심을 느끼자, 이홍에게 사약을 내렸으며, 차남 이현이 왕위에 올랐을때 그의 왕비인 위후가 측천무후의 권력을 위협하자 이현(중종)을 폐위시키고, 자살하게 만들었다. 이외에도 그녀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 많은 권력다툼을 일으켰고, 수 많은 신하와 왕족을 유배 보내고 죽였다. 그녀는 65살이 되던 해 당나라에서 주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가 되었다. 측천무후는 황제된 이후 전국 각지에서 미남을 뽑아 방항한 생활을 한다. 측천무후는 70살의 나이에도 20대의 피부를 유지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그녀는 80대에 이르러 노환으로 건강이 좋지 못하였고, 재상 장간지의 반란에의해 폐위되었고, 이후에 죽게 되었다. 잔인한 공포 정치와 남성 편력으로 희대의 악녀라 평가 받는 측천무후지만,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통해 주나라를 발전 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킨다음 다양한 제도를 시행했다는 좋은 평가도 있다. 실력있는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시행한 과거제도와 행정체계정비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여성으로서 가장 낮은 신분에거 최고 권력자가 되었던 측천무후. 권력에 취해 보여준 광기어린 모습의 측천무후. 측천무후는 중국의 3대 악녀 중 첫번째이다.
측천무후
궁녀에서 황제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서태후 서태후의 본명은 예어나라이다. 그녀는 유복한 관리의 딸로 태어나지만 부친의 몰락으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궂은 일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녀는 궁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녀의 출중한 외모 덕에 황제의 궁녀로 들어가는 것에 성공한다. 그녀는 출중한 외모와 말쏨씨와 아름다운 노래 소리르 가지고 있었다. 이는 황제가 서태후에게 빠지게 되는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황제인 함풍제의 아들을 낳게되면서 황제의 큰 환심을 사 궁녀에서 귀비로 승격하게 되었다. 이후 함풍제가 죽자 서태후와 함풍제 사이의 동치제가 황제가 된다. 하지만, 동치제의 나이는 당시 5세였기에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한다. 이때부터 서태후라 불리게 되었다. 그녀는 부국강병을 위해 적극적으로 인재를 등용하였고, 중국 남부에서 세력을 확장한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고, 영국과의 전쟁인 아편 전쟁의 패배로 쇠약해진 나라를 회복시키는 등의 성과를 보인다. 이 시기를 동치중흥이라 부르고, 청나라의 국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 유지에 관심을 보인다. 자신의 아들을 정치적 라이벌로 분류해 그를 향락의 길로 타락시키고, 동치제의 아내 또한 심한 언행으로 구박하여 자살을 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아들인 동치제가 매독으로 죽게되자, 그녀는 어린 조카인 광서제를 황제로 삼고 서태후 가문 여인을 황후로 맞이한다. 나이가 든 광서제는 서태후에게서 벗어나려하지만, 서태후가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실패하게 되고 광서제는 자금성에 유폐되었다. 서태후는 최고 권력자가 된 후 엄청난 사치를 즐긴다. 온 나라의 존망이 걸려있던 청일 전쟁 중에도 함대를 지원할 본국의 군자금을 빼돌려 자신의 거처인 이화원을 확장하는 공사를 시행한다. 또한 서태후의 한끼 식사는 128가지의 음식으로 구성되었다. 한끼가 농밍의 1년치 식비였다 전해진다.
서태후
'제자백가란?' 중국 문화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사상 분야중 하나이다. 특히 춘추전국 시대라는 정치 사회의 대 격동기를 지나면서 사상가들의 출현, 역사적 지혜를 바탕으로 세계 문화사상중 사사정 황금기를 보냈다. 제자백가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활약한 학자와 학파의 총칭이다. 제자란 여러 학자를 칭하는 말이고, 백가는 수 많은 학파를 의미한다. 즉, 제자백가는 수많은 학파와 학자들이 자유롭게 사상과 학문을 펼쳤던 중국의 사상 황금기를 말하는 것이다. 제자백가는 주왕조의 몰락으로 인해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만들어졌다. 유가, 법가, 도가, 명가, 종횡가, 농가, 음양가, 잡가 등 대표적 학파들이 잘 알려져있다.
제자백가
우리의 유교 사상에도 영향을 준, 유가 유가사상은 공자의 인과 예를 통해 도덕적 인간이 완성되는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맹자와 순자의 학문, 송대의 성리학과 명대의 양명학에 이르기까지 약 2천년간 중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이 있었던 학문이다. 공자는 당시 사회 혼란을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회복해야 할 도덕성이 '인'이고 '예'를 통해 구현해야 한다 말했다. 인은 인간의 내면적인 도덕성을 말하고, 예는 사회 규범, 사회 제도와 같은 도덕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말한다. 공자는 인과 예를 갖춘 사람을 군자라 말한다. 또한 덕치 사상과 정명사상을 주장하고 있다. 공자의 사상은 맹자와 순자로 이어지게 된다. 맹자는 인간의 마음은 본래 착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하고, 순자는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본성을 가졌다는 성악설을 주장하면서 예를 통해 이익과 쾌락을 눌러야 한다고 한다.
제자백가, 유가
추상적인 학문에서 실질적인 사상으로, 법가 법가사상은 유가의 덕치주의와는 반대로 법과 형벌에 의한 통치를 말하고 있다. 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관중과 상앙이 초기에 정립하였고, 한비자에 의해 완성된 사상이다. 한비자는 천하를 통일하고, 진정한 의미의 치국을 하려면, 법이 필요하며 법을 어겼을 때는 엄격한 형벌을 내려야 한다 주장한다. 한비자는 추상적인 도덕 원리가 아닌, 객관적 기준을 법률과 형벌로 세우려 했다. 이 법가 사상은 중국 고대의 여러 학파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성이 강하다. 중국과 한국 등 다양한 나라에서는 표면적으로 유가의 덕치 사상을 이념으로 삼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엄격한 법과 형벌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법가 사상의 영향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법가 사상은 막연한 이론이 아닌, 현실 상황을 직시한 통지를 주장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자백가, 법가
병법으로 세상을 보다, 병가 병가는 제나라의 손자에 의해 정립된 사상이다. 병법을 통해 가르치고 있다. 병가의 사상가인 손자는 손자병법이란 병법서로 잘 알려져있다. 병가는 유가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단순히 전략, 전술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외교 등의 분야 전반, 현대에 이르러서는 개인의 처세술에도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제자백가, 병가